1. <나는 과장이로소다>
오빠, 택이, 강서방, 형, 외삼촌, 작가님, 선생님, 태재님. 나를 부르는 수많은 호칭들 사이로 얼마 전 한 가지 호칭이 더 생겼다. 이름하여 ‘과장님’. 한국의 실리콘밸리라 주장하는 서울 성수동, 이곳에서 종이책을 만드는 출판사에 입사했다. 실리콘밸리답게 회사이름은 영문이지만, 구성원의 이름은 성명+직급 체계로 부르며 수직적 문화를 지키고 있다.
내가 아주 어릴 적 그러니까 초등학교도 가기 전 시절, 아빠가 회사에서 과장을 달았다며 온 가족이 오손도손 축하했던 기억이 있다. 문장을 제대로 말하지도 못했을 어린이는 과장이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었겠지만, 무언가 좋은 것을 ‘달았다’는 촉감은 기분 좋게 남아 있다. 크리스마스 트리에 오너먼트를 달듯이, 발렌타인데이에 선물 받은 초콜릿이 달듯이.
어느덧 서른일곱의 나이. 30대는 내내 프리랜서로 지냈으니 사무실 생활을 하는 건 7년 만이다. 20대에는 전공을 살리고 죽이며 짧고 굵게 여러 회사에 다녔다. 그와 동시에 독립출판으로 작가 활동을 하면서 되면서 일의 책임감을 배웠고, 글쓰기 수업을 통해 만난 1,100여 명의 수강생 덕분에 다양한 맥락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름대로의 만족과 나름대로의 인정이 있던 30대였다.
그리고 그 나름대로 때문에 나는 다시 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간단히 말하자면 혼자의 한계를 느꼈던 것이고, 대단히 말하자면 텍스트를 다루는 직업인으로서 더 넓은 지면과 화면을 갖고 싶었다. 동료들과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희망하고 실망하고 건배하고 위로하는 회사생활이여! 빽빽한 전철로 출퇴근하며 사회구성원이 된 듯한 착각은 월급쟁이의 특권이요 대도시의 별미다.
벌써 한 달 전, 출근 이틀 차의 스몰토크를 잊을 수 없다. 모니터 속 방대한 자료를 보고 있던 중, 팀 막내인 수연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과장님, 저희 점심 회식 메뉴 뭘로 할까요?" 과장이 처음인 나는 당황해서 "저요?"라고 대답해 버렸고, 급하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음, 전 아무거나 괜찮은데, 근데 그게 제일 어렵죠?" 그랬더니 돌아오는 03년생 수연님 대답. “뭐… 쉽진 않네요.” 한 달을 지내보니 수연님의 장점을 알겠다. 수연님의 말에는 과장이 없다!
의미를 찾는 인간은 사전을 펼치고, 의미에 재미까지 찾는 인간은 <영한 인생 사전>을 펼친다. 새 학기에 나온 따끈한 신간을 읽고 내가 찾은 단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회사나 관청 따위에서 과를 단위로 하는 부서의 책임자.’ 과장이란 단어의 사전적 정의인데, 21세기에 관청이 웬 말인가 싶어 영어 사전도 찾아본다. ‘head of section’. 그래, 나는 관청이 아니라 마케팅팀의 머리가 된 것이다. 남자는 뚜껑싸움이라는 말이 이렇게 다가오다니… 나는 머리를 잘 쓰는 과장이 되어야 한다.
서울숲 바로 앞 아담한 출판사. 3월 한 달 동안 벌써 두 권의 책이 나왔고, 네 번의 북토크와 한 번의 회식에 참가했다. 편집부 과장님의 첫 마감을 축하하는 번개도 있었고, 3월에 태어난 동료들 덕분에 생일 케이크도 두 번이나 먹었다. 75년생 편집팀 실장님부터 05년생 디자인팀 막내까지. 닉네임이나 수평 지향은 없지만, 챙기고 싶은 후배가 있고 배우고 싶은 선배가 있다. 글이란 과연 수평적일까 수직적일까? 문장은 위로 향하기보다 아래로 향하고, 아래로 향하기보다 새 페이지로 향한다. 혼자서 쓰고 채우던 페이지를 함께 채운다. 월급이 달다. 3월도 달았다! |